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이 28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을 갖기로 하면서 극한으로 치닫는 듯했던 신·구 권력 간 갈등이 일단은 봉합 수순을 밟는 모양새다.
가장 큰 쟁점이었던 감사원 감사위원 공석 두 자리에 대한 인사권을 사실상 윤 당선인이 가져가는 쪽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며 핵심적인 대립 요소가 일부 해소되면서 회동 논의가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당선인 사이의 회동 지연이 '역대 최장'에 이를 정도로 팽팽한 샅바싸움이 계속되며 국민적 여론이 나빠진 것 역시 양측 모두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선 직후만 해도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논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앞서 문 대통령은 대선 이튿날인 10일 윤 당선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양측은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는 입장을 교환했다.
같은 날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이 축하 난을 전달하기 위해 윤 당선인을 찾았고 이 자리에서 이 수석과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이 '핫라인'을 구축해 회동 일정을 조율하기로 했다.
지난 14일에는 양측의 회동이 16일 오찬으로 잡혔다는 보도가 나왔고 청와대는 그다음날 15일 세부 일정을 기자단에게 공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오찬을 불과 4시간 남겨둔 지난 16일 오전 8시 양측이 동시에 "회동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며 만남 불발을 공식화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현직 대통령과 당선인 사이의 회동이 예고 뒤에 불발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회동 연기 사유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고, 청와대 안팎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문제 등이 공개적으로 거론되며 양측 모두 부담이 커졌을 것이라는 추측만 흘러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회동 결렬에는 한국은행 총재·감사원 감사위원·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등의 임기 말 인사를 문 대통령이 그대로 하느냐가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감사위원 인선안에 대해서는 양측이 첨예한 대립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측은 공석이 두 자리인 만큼 한 자리씩을 각각 추천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윤 당선인 측은 '당선인 측에서 거부하는 인사는 임명하지 않겠다는 점을 약속해달라'는 이른바 '비토권 보장'을 요구했고 이에 청와대 측은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윤 당선인 측의 '인사동결'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며 불만을 터뜨렸고, 윤 당선인 측은 청와대의 '1명씩 추천' 제안이 감사위원 7명 가운데 '친(親)문재인 성향 인사'를 다수인 4명 이상으로 만들려는 의도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등 양측 입장은 평행선만 그렸다.
공전이 계속되자 문 대통령은 18일 "청와대의 문은 늘 열려있다. 무슨 조율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최대한 빨리 회동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윤 당선인 측도 "국민이 보시기에 바람직한 결과를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화답하며 조금씩 회동이 진전될 것 같은 조짐도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윤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을 브리핑한 것을 두고 청와대가 공개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회동 기류는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이 수석과 장 비서실장은 21일 오후 서울 모처에서 실무협의를 했으나 이 협의가 끝나자마자 청와대가 집무실 이전 계획에 안보상의 우려를 표명하고, 이전을 위한 예비비 집행 안건의 국무회의 상정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이후에는 양측의 충돌은 더욱 격해졌고 감정싸움까지 벌이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지난 23일에는 문 대통령이 이창용 신임 한국은행 총재 지명을 발표했지만 이를 두고 양측이 사전협의를 했다는 청와대 측과 협의가 없었다는 윤 당선인 측 의견이 갈리며 진실 공방을 벌였다.
이튿날인 24일에는 문 대통령이 "답답해서 한 말씀 드린다. 회동 조율에 무슨 협상이 필요한가"라며 빠른 회동을 촉구하면서도 "윤 당선인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말고 당선인께서 직접 판단해주시기 바란다"며 이른바 '윤핵관(윤 당선인 측 핵심 관계자)'을 저격하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같은 날 윤 당선인도 직접 나서서 "차기 정부와 일해야 할 사람을 마지막에 인사 조치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며 문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등 두 사람의 정면충돌 양상까지 빚어졌다.
이처럼 험악해져 가던 양측의 줄다리기는 지난 25일 핵심 쟁점이었던 감사원 감사위원 인사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다시 한번 변곡점을 맞았다.
감사원은 25일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된 논란이나 의심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윤 당선인과 협의 없이 감사위원을 임명하려 할 경우 제청을 하지 않겠다고 반기를 든 것으로, 결국 감사위원은 사실상 윤 당선인 측의 의사에 따라 인선이 이뤄지게 된 셈이다.
감사위원 인선에 대한 힘의 균형추가 윤 당선인 쪽으로 단숨에 쏠리면서 더는 양측이 실무협의에서 이를 두고 기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하 ICBM) 발사 이후 엄중한 안보 상황을 고려하면 신·구 정부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대립이 지나치게 장기화하며 국민들의 피로도도 높아져 가는 상황이었고 이에 이 수석과 윤 당선인 측의 실무협상 채널이 지난 25일 밤부터 재가동됐다.
양측 브리핑에 따르면 청와대는 이 채널을 통해 '문 대통령이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윤 당선인과 만났으면 한다'는 입장을 윤 당선인 측에 전달하고 윤 당선인이 "국민의 걱정 덜어드리는 게 중요하고 의제 없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자"는 취지의 답변을 청와대에 전하면서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일정이 극적으로 합의됐다.
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10일 첫 통화에서 윤 당선인에게 회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을 포함해 네 차례나 '만나자'는 제안을 한 끝에 윤 당선인과의 대면이 성사된 셈이다.
결국 양측은 대선 이후 19일만인 내일(28일) 처음 얼굴을 맞대게 되며 이는 역대 현직 대통령과 당선인 간 회동으로서는 '최장기간' 기록으로 남게 됐다.
사진= 문재인 대통령-윤석열 대통령 당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