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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돈 이야기] 부(富)와 명예(貴)를 이루는 길

배문한 발행인 입력 : 2022.11.22 수정 : 2022.11.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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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는 함께 서있을 수 있을까?

강건욱 칼럼니스트

[사진=강건욱 칼럼니스트]

세상을 살아간 천재들을 꼽으라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짐작했겠지만 그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이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견한 ‘상대성 원리’에 대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대중들이 어렵다고 투덜대자, 한 가지 신박한 방법을 착안해 낸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한 문장으로 답한다.

“상대성 원리가 무엇이냐고요? 만약 당신이 뜨거운 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일 분은 두 시간처럼 느껴질 겁니다. 반면, 천하절색의 미녀와 함께 있다면 두 시간도 일 분처럼 느껴질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의 원리입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라는 단어에서 보여 지듯, 원래 부(富)와 귀(貴)는 샴쌍둥이처럼 한 단어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시간이 흐르며 부(富)와 명예(貴)로 분리되더니, 이제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개념이 됐다. 이러한 대립의 모습은 장관 등 고위공직자들의 청문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청문회를 통해 그간 명예를 얻고자 날고뛰던 내정자들이, 그들이 일군 부(富)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자 이를 군색하게 변명하다 줄줄이 낙마하는 경우를 수 없이 본다.

부와 명예, 이 둘의 관계는 과연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 부가 더 높은 것일까, 아니면 명예가 더 좋은 것일까? 명석한 아인슈타인이라면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을까? 아마 이번에도 상대성의 원리에 입각해 이렇게 말했으리라.

“대통령은 연봉이 3억 원이고, 은행장 연봉은 30억 원으로 은행장이 열배 많지만, 대통령은 사회 각계각층에 무려 오천 명 정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한이 있으므로 은행장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다.”라고.

청문회란 후보자가 국정을 운영하는 고위공직의 자리에 맞는지 살피는 시간이라, 그간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이고, 역시 자기 자신이 큰 흠과 약점을 가진 것을 아는 것도 자신일 텐데, 핸디캡이 있는 부적절한 사람들이 자리를 준다는 제의에 왜 그리도 스스럼없이 수락하는 가다. 여기서도 잊지 못할 요행(僥倖)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걸까?

내친김에 국립국어원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스스럼없다’는 말을 찾아보았다. ‘조심스럽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없음을 뜻함’이라고 분명하게 명시되어있었다. 앞으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이들은 ‘스스럼없다’는 말을 꼭 상기하면 좋겠다.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돌아보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국가와 국민을 살필 수 있는 자리에 가기만을 바랄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 오늘날에는 장관 등 고위공직의 자리인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동산 투기, 병역의무, 자녀 국적, 학위논문 문제 등 이른바 ‘마(魔)의 4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최근 청문회 자리에서 눈물을 훔치고 떠난 어느 후보는 “나는 절대로 투기를 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과연 국민의 판단과 일치할까? 아무리 한결같은 사람이 좋다지만, 왜 우리사회에서는 늘 변함없는 부정부패(不正腐敗)로 낙마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걸까?

이는 번번이 자신이 가진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높은 명예의 자리에 나아가려 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현재 가진 부나 명예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자리(명예)와 부를 탐하는 변치 않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이들을 시샘하고, 그가 가 가진 부(富)를 보고 절을 하진 않지만, 벼슬(권력)을 보고는 앞 다투어 모여든다. 그래서 명예가 있어야 비로소 삶이 완성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부와 명예, 과연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걸까?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다. 양립할 수 없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느냐고? 30년 전에 이미 YS(김영삼 前 대통령)가 단순무식하게(?) 명령했으니까 말이다. YS는 1993년 당시 몇몇 장관 후보들이 청문회 자리에서 부동산 문제로 연일 언론의 질타를 받자 크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부와 명예 중 하나만 선택하라!”

물론 우리는 이러한 YS의 일갈이 틀리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오죽 답답했으면 저리 말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와 명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부와 명예의 월계관을 주는 결정권은 오로지 국민에게 있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투명해질수록 국민의 눈은 더욱 높아진다. 이제 국민은 당신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그러한 재산을 축적 할 수 있었는지 하는 ‘How’에 대해 묻는다. 시대가 점점 투명해지는 것에 발맞추어 자신의 삶 역시 투명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사회도 확고한 전문성을 통해 정승 같이 벌어야지, 개 같이 벌면 명예의 옷은 입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서울 한 복판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가 요즘 소소한 주말 농부가 되었다며 갑자기 가짜 농부가 되는 방법을 알려 주더라. 그래서 따라했을 뿐이다.”라거나 “다른 취미가 없어서 지방의 상가나 오피스텔 수집을 취미로 삼았는데, 그냥 돈이 저절로 따라오더라. 근데 그게 뭐 잘못 됐나?”라는 저급한 생각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아니, 통해서도 안 된다. 해당자들은 애써 강변하지 말라. 억울하게 낙마했다고, 분하다고 눈물을 훔칠 게 아니라 ‘스스럼 있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게 맞다.

이런 점에서 장관이나 수석, 또는 기관장을 하려면 반드시 해당분야의 전문지식을 입증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임하는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 소양’이다. 우리사회의 고질병과도 같은 ‘낙하산 인사’가 스스럼없이 반복되는 것도 전문성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사회적 풍조도 한몫을 한다.

다시 한 번 헤아려 보자. 명예는 분명 권력을 준다. 그 권력의 원천은 오로지 국민에게 있다. 그런데 국민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과 질투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명체다.

지난 2016년 미(美)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을 제외하고는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어느 국가에서도 재벌 총수나 그룹의 회장이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사업가인 로스 페로가 몇 번이나 출마했지만, 결국은 두 번다 빌 클린턴 좋은 일만 시켰다. 언론재벌인 마이클 블룸버그도 매번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하지만, 늘 중도에 하차한다. 시계를 더 오래전으로 돌려보면 세계 최초로 자동차 대량생산을 이룬 헨리 포드가 상원의원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한국의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회장도 대선에 나왔지만 패배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나 버크셔 헤서웨이의 워런 버핏, 역사상 가장 부유한 과학자라 불리는 짐 사이먼, 또 마이크로소프트의 욕심 많은 빌 게이츠 같은 이들은 대통령에 나오려는 꿈은 꾸지 않는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조금 더 뒤로 돌려보자. 19세기 중반 이후 태동해 1900년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며 화려하게 인생을 장식했던 왕(王)들은 어떠했나?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던 석유왕 록펠러나 철강왕 카네기, 그리고 철도왕 벤더빌트나 은행왕 모건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 얼굴을 내밀기는커녕 뭇매를 맞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들은 병원 및 대학설립 등으로 추앙받아도, 당대에는 강도귀족(Robber Barons)이란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남성특유의 감정과 질투, 부자들의 머니 애니멀(Money Animal)과 같은 속성의 합작품 때문이다. 원초적으로 남성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것에 대해 강한 질투를 느낀다. 그래서 부자가 국가 최고위 선출직에 당선된 역사가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있었지 않느냐고?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와 태국의 탁신 같은 이들은 내각제라고 하는 방식에서 총리를 한 것뿐이다. 그마저도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쯤 되면 짐작이 갈 것이다. 부와 명예는 친(親)하지 않다는 것을.

새천년이 시작한지 어느새 23년이요, 2020년대가 시작한지도 3년이 꼬박 지났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총리나 장관 혹은 그에 버금가는 고위공직자를 하려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평생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일찍부터 명예를 지켜나가야 하며, 고귀한 자신의 브랜드를 부단히 가꿔온 자들만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바람직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여 경제의 근현대적 의미를 인류에게 처음으로 제시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1723~1790)는 ‘왜 명예를 추구하는 자가 돈을 함께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명쾌하게 한마디로 정리해 놓았다. 아담 스미스의 이 말은 부와 명예는 양립하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명예는 명예로운 보수를 형성하는 가장 큰 부분이므로 일반적으로 보상이 낮아도 기꺼이 이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나 가장 혐오스러운 직업인 사형집행인은 일의 양에 비해 다른 어느 직종보다도 훨씬 많은 보수를 받는다.”

아, 물론 총리나 장관직을 제안 받아도 손사래 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실로 애덤 스미스의 진리를 깨달은, 자기 분수를 아는 현자들이다. 자신의 실제 능력과 자신의 장단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와 명예를 이루고 지키는 길은 스스로의 만족(滿足)과 지족(知足)에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는 것 아닐까.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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