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위한 空間(45)] 대통령(지도자)에게 말하고 싶다면?
-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에 관하여 -
보통 동서고금의 문학 가운데 최고의 ‘서사시(epic)’로는 호메로스(Homer)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꼽는다. 그중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Cassandra)’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태양신 아폴론의 저주를 받아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카산드라는 무척이나 우울했을 것이다. 상대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 보고, 그에게 불행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는데도 상대는 그녀의 호의를 악의로 받아들일 뿐이니 얼마나 슬프고 답답할 노릇이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당신이 친절히 예견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큰 손해를 입었다면, 그것도 당신이 말했던 것과 동일한 피해를 보고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당신은 상대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물론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라며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진 않는다 해도 대중 앞에서 당신의 정확한 예지력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때 상대가 당신의 친구나 아주 가까운 지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일국의 군주나 지도자라면 다르다.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신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
시대를 거슬러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으로 가보자. 진(秦)나라 장군 백기(白起, ?~B.C.257)는 장평 전투 당시 조(曹)나라 병사 수만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해 극악의 공포를 불러오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백기는 왕에게 두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승리의 기세를 몰아 조나라 수도인 한단(邯郸, 현재 허베이성의 주요 시)까지 공격하자는 것과,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아예 철병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공격을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진 왕은 백기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백기를 해임하고 직접 한단 공격에 나섰다. 화가 난 백기는 병가를 내고 아예 집으로 돌아갔다. 진나라 군대는 누차 한단을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왕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후, 다시 백기에게 전선에 나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화가 풀리지 않았던 백기는 병을 핑계 삼아 출정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온 진 왕은 백기에게 명령 불복종으로 자결할 것을 명령했다.
필자는 이 일화를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본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이라 했는데, 백기의 말은 치밀한 상황 분석에 따른 매우 합리적이며, 결과적으로도 옳은판단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 옳은 말을 하고서도 죽어야 한단 말인가?
주지하듯 백기의 말이 틀리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제왕(지도자)에게 있어서는 체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잘못은 저지를 수는 있지만, 제왕 즉 지도자(오늘날 현대국가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 등 최종 결정권자)에게 실수나 자신의 결정에 대한 번복은 사실상 허용하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진 왕이 자신의 의견대로 전투를 감행했다가 패한 것만으로도 왕에게 있어서는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랬던 진 왕이 백기에게 출병을 요청한 것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의 불완전함과 미숙(未熟)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 것인데, 백기는 이에 불응하는 태도를 보여 왕에게 부끄러움을 모면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이러한 백기의 행동은 온 백성에게 왕이 어리석고, 권위도 있지 않다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설사 왕이 실제로 ‘바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는 왕이기에 신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바보’이니 어쨌든 백기의 목숨을 언제든 충분히 앗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백기가 좋은 대접을 받기는, 아니 무사할수 있음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백기의 경우와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와 원소가 벌인 큰 전투인 관도대전(官渡大戰) 이후 원소의 감옥에 쪼그리고 앉아 탄식을 한 전풍(田豊, ?~A.D.200)의 일화가 그렇다. 임종을 앞두고 전풍은 이렇게 탄식하며 내뱉었다. “남을 기분 좋게 하는 예언을 하지 않는 자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전풍은 후한(後漢) 말기의 관료로, 원소를 위해 계책을 바쳐 공손찬 평정에 공헌하였으나, 조조와의 전쟁을 반대하다가 옥사한 인물이다. 당초 전풍은 원소에게 관도대전은 분명히 패하므로 개전하면 안된다고 조언했다. 만약 원소가 이기면 전풍은 틀린 것이 되므로 전풍은 변고를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히려 전풍의 말대로 원소가 패해 전풍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는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군주(지도자)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간단한 이치다.
비록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에 대해 일개 범부(凡夫)도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가천하(家天下), 즉 한 집안의 천하와 한 나라의 군주의 천하라는 틀에서 크건 작건 강산(江山)은 어쨌거나 군주(지도자)의 것이다. 백기나 전풍의 경우처럼 국가의 안위나 백성(국민)을 염려하거나, 또는 개인의 양심과 도덕 때문에 왕(지도자)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하는 것은 당신 자유이지만, 당신의 의견을 듣는 것은 오로지 ‘상대’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왕(지도자, 결정권자)이란 끝을 봐야 하는 인물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인간의 성정(性情)은 그대로다. 왕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일단 개인의 의견은 보류할 일이다. 무리하게 계속해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나와 당신 모두 마찬가지다. 당신은 당신의 의견과 생각이 누구보다 옳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하겠지만, 당신의 동료나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자신의 의견이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시 비운(否運)의 카산드라, 그녀가 생각난다. 누구인들 자신의 괘가 영험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리 당신이 바른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귀찮게 매달려도 상대(왕)가 마음을 닫고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효과는커녕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도 전풍의 예측대로 원소가 패하자 ‘전풍이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는 다른 신하들의 중상모략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엉터리 중상모략이었지만 전풍의 평소 태도는 충분히 오해를 불러올 만했다. 언젠가 전풍은 원소에게 허도(許都, 조조의 수도, 현재 허난성의 중심도시)로 진격하자고 했지만, 원소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전풍은 분을 못 이겨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만약 전풍이 평소 이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다른 동료들이 아무리 전풍을 비방하며 음해하더라도 원소는 믿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위험을 예견하고 왕(지도자)에게 의견을 올렸는데, 왕이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나라 말의 이밀(李密, 582~619)은 유력한 군웅의 한 사람으로 수 양제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패해 후일 당(唐)의 고조(高祖)가 되는 이연에게 투항한다. 그 후 다시 처지가 여의치 않자 역모를 꾸민다. 심복인 가윤보나 왕백당이 그에게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며 말렸지만, 그는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다. 가윤보가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하지만 이밀은 가윤보의 의견을 듣지 않았고, 이에 가윤보는 이밀을 떠난다. 그러나 왕백당은 또 한차례 이밀을 설득했다. 그래도 이밀이 듣지 않자 두말없이 이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왕백당처럼 충신(이밀의 입장에서)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가윤보처럼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뜻에 달려있다.
물음에 대한 답이 부족했다면, 노골적으로 답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수 양제의 재상이었던 두엄은 수나라와 왕세충의 정나라에서 모두 관리를 지냈던 인물이다. 이후 그는 당 태종 밑에서 기율을 관리하는 어사대부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어느 날, 당 태종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수 양제와 왕세충의 불운한 결말을 충분히 짐작했을 텐데 왜 그들에게 미리 의견을 올리지 않았던 거요?”
그러자 두엄은 수나라에서 관료를 할 당시에는 자신의 관직이 낮았기 때문에 의견을 올릴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왕세충의 정나라에서는 의견을 여러 차례 올렸지만 왕세충이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그 두 사람과는 달리 기꺼이 의견을 들으시고, 결과가 맞든 안 맞든 탓하지 않으시니 제가 감히 의견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제 알겠는가? 사리에 맞는 말을 했다고, 누구보다 탁월하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한들 무엇을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또 설사 결과가 생각과 달랐다고 할지라도 또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핵심은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듣는 이의 성품과 성향을, 그리고 나 자신의 지난 행동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껏 언급한 내용은 결국 '윗사람에게 말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며, 상관에게 갖가지 미사여구로 아부를 해야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분별하여 적당한 때에 하라는 것. 부디 오해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급변하는 2023년, 오늘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정부 여당,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국정 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직언과 간언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라면, 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윗사람에게 의견을 내어야 할 이들이라면, 그리고 크든 작든 조직체(組織體)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무쪼록 오늘 이야기를 꼭 한번 귀담아 들어보시기를.
오늘 이야기는 세상살이(處世)에 관한 이야기, 당신과 나를 위한 이야기니까 말이다.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