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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강건욱 칼럼니스트 입력 : 2023.05.23 수정 : 2023.05.2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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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바꾸어야 모두가 산다

[돌고 도는 돈 이야기(41)] 지금, 주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생각을 바꾸어야 모두가 산다 -

주택 칼럼

 

지난 5월 6일, WHO(세계보건기구)가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19 비상사태 해제를 발표했는데, 우리의 경우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는 다시 2만 명을 훌쩍 넘긴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럼에도 코로나19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여름이 된 듯한 높은 기온 때문인지 코로나19는 이제 우리 관심 밖의 문제가 된 듯하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작년까지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지난해 미국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한 달 동안 입원했던 환자에게 한화로 약 13억 원 정도의 치료비가 청구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1,300만 원도, 1억 3천만 원도 아니고 무려 13억 원이다. 만일 이 환자가 자산이 많지 않거나, 또는 보험이 없다면 파산에 충분히 이를 만한 금액이다. 다행히 환자는 보험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부담해야 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질병 치료에 사회나 정부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질병 치료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고, 시장의 법칙이 적용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지니고있는 곳이 바로 미국 사회다. 그렇다 보니 미국의 의료비는 비싸기로 유명하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다면, 생각하기 싫지만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코로나19 환자를 국가가 나서서 무상으로 치료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부분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코로나19 확진자들의 검사비와 진료비, 약값 등을 모두 공짜로 제공했으며, 기저질환자들에게는 보건소에서 산소포화도 측정기도 보내주고, 심지어 코로나19가 왕성했던 기간에는 ‘격리 지원금’까지 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든 국민은 의무적으로 공적 보험인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소득에 따라 부과되는 이러한 보험료는 사실상의 세금이다. 세금이란 말은 쉽게 말해, 일 년에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도 차별 없이 부과한다는 의미다. ‘질병 치료’를 개개인의 능력이나 시장의 법칙에만 맡길 수 없고,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공감대였다.

 

이처럼 의료 서비스 부문에서는 한국과 미국, 두 나라가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언론에서는 연일 아픈 사람에 대한 치료를 개인의 문제, 시장의 논리로 풀려던 세계 최강국 미국의 의료 서비스가 우리 대한민국과 비교가 안 된다는 내용의 보도를 쏟아내었다. 물론, 한 국가가 질병과 재난에 대비하는 모습에는 각 나라마다 처해진 환경, 다시 말해 인구구성이나 영토의 크기, 행정 기구와 의료 서비스의 형태 등 기타 사회적 배경도 모두 고려해서 보아야 하므로 소위 ‘매뉴얼’이라고 하는 대응 방식은 하나로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어떠한 관점으로 문제점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생각의 차이가 만든 결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이쯤 되면 ‘코로나19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그러드는 마당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론이 기냐?’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겠다. 오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잘못된(?) 의료 체계와 우리와의 비교가 필요해서였다. 오늘날 미국의 이해하기 어려운(전 국민 건강보험이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의료 체계처럼, 우리에게도 ‘한 생각’을 잘못해서 점점 더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주택문제’다. 지난해 중반부터 주택 가격이 크게 하락하고, 부동산 시장은 침체기에 놓여 있지만 여전히 높은 집값 때문에 무주택자들은 박탈감에 빠지고, 이른바 ‘부모 찬스’가 없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집을 구할 수 없어 결혼도 미룬다고 한다.

 

오늘은 바로 이 ‘주택’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주택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의료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주택문제를 개인과 시장의 문제로 보는 경우다. 주택 또한 ‘상품’이기 때문에 집값의 변동은 시장 법칙에 따른 것이고, 집으로 ‘떼부자’가 되든, 반대로 ‘벼락 거지’가 되든 온전히 개인의 판단과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또 다른 시각은 주택이 가진 ‘공공성(公共性)’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주택문제는 개인과 시장을 떠나, ‘사회 문제’로 진입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집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그리 크지 않다. 이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큰 영역이지만, 일단 한 국가에서 주택이 왜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갖는지 몇 자 적어 본다.

 

일단 주택은 ‘땅’을 전제로 한다. 땅 없는 집은 없다. 그런데 땅은 국가,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수복지구’란 말이 있다. 수복(收復)이란 말 그대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다는 뜻인데, 수복지구와 반대인 경우를 북한에서는 ‘신(新)해방지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1945년 광복을 맞아 박 씨는 지금의 강원도 낙산에, 최 씨는 황해도 개성에 땅을 잔뜩 사두었다. 6.25 전쟁이 끝났을 때, 낙산은 ‘수복지구’, 개성은 ‘신해방지구’가 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최 씨는 쫄딱 망했고, 박 씨는 기사회생했다. 게다가 낙산 땅이 속초시로 편입되면서 가격이 치솟았다. 박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겠지만, 그 후손들은 ‘지주’가 되어 땅땅거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 씨에게 땅을 되찾아준 건 전장에서 쓰러져간 군인들이고, 북괴로부터 소중한 국토를 지켜낸 모든 국민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박 씨나 박 씨의 후손들이 ‘내 땅’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일만도 아니다. 이 지점에서 너무 특수한 상황을 일반화시켰다고, 극단적인 사례라고 필자를 몰아세우기 전에 ‘박 씨의 땅은 본래 누구의 것인가?, 무슨 근거로 박 씨와 그 후손들은 그들만의 재산임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땅, 즉 사유지라고 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내 땅에서 유전(油田)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석유가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국가에서 도로를 만들거나, 택지를 조성한다면 모두 내놔야 한다. 보상은 나중 얘기다. 이런 식이면 우리 사회에서 토지가 사유재산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사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땅이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물론 주택과 땅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주택은 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택 역시 공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집을 짓는 것 자체가 사회적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도 공공성의 하나의 이유다.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초고층 주거시설은 누군가가 조망권, 일조권의 침해를 수긍하고, 사회적 동의가 가능했기에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주택의 입지 및 자연환경 등에도 분명 공공적인 성격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면 앞으로도 도시환경이나 건축 미학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가 계속될 수 있다.

 

지금까지 ‘주택의 공공성’에 대해 다소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는 독자들의 공감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주택의 공공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듯, 주택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도 개인과 시장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올해 들어 정부는 주택 시장을 활성화하고 무주택자들의 주택 마련을 위해 여러 가지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돈을 빌려주겠다’는 대책이다. 집값이 오른 만큼 금융기관에서 더 많이, 더 잘 빌려줄 수 있게 국가는 규정 변경 등을 통해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상환이 부담스럽다고 하니 그러면 50년에 걸쳐 천천히 갚으라고 한다. 젊어서 빚으로 집을 사고 70세까지 갚으며 살라는 얘기다. 당연히 이자도 내야 한다. 살기 위해 필요한 집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어딘가 잔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다시 정부는 주택문제를 ‘공급의 확대’로 해결하겠다고 한다. 가능할까? 우리 사회의 주택 수요는 ‘살 집’에 대한 수요와 투기적 수요가 섞여 있다. ‘집 투기’에는 남녀노소, 교육 수준, 직업, 사회적 지위의 구분 없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부동산 투기가 ‘시대의 특혜’였다는 소리까지 나왔을까?

 

본래 ‘투기’에 대한 수요는 끝이 없다. 인간의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급을 늘리면 주택문제가 해결된다고 확신할 수 없을 뿐 더러, 무작정 공급을 늘릴 수도 없는 일이다.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늘어난 공급으로 또 다른 주택문제가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 집’에 대한 수요도 공급으로 충족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원하는 지역에는 이미 집이 빽빽하다. 어쩔 수 없이 대체지역에 공급할 수밖에 없다. 이 공급으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비유하면 이렇다. 나는 빵을 먹고 싶은데, 이런 내게 국수를 주면서 “밀가루로 만들었으니 똑같은 거야”라고 주장하는 형국인데, 원하는 지역에 살고 싶은 무주택자들에게 과연 설득이 될까?

 

그래서 주택문제는 개인이나 시장에게만 맡겨놓을 일이 아니다. 이재민, 의료 서비스의 문제처럼 사회와 국가 차원의 고민과 대책이 필요하다. 국가는 공공의 편의를 위해 도로나 철도를 건설하고 관리한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기본적인 농수산물을 비축, 관리한다. ‘집’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두 해에 해결될 일도 아니고, 재원 마련을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택의 공공성’에 대해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아니, 우리나라 국민 중 누구도 주택을 공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집’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가 어릴 때 만해도 “음식을 남기면 벌 받는다”라고 실제로 어른들이 밥상에서 종종 말씀하셨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과거 배고픈 시절 음식의 소중함, 그리고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누군가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집’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삶에 있어 ‘필수 요소’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이미 진부한 표현이 된지 오래라 안타깝지만, 더 이상 집은 ‘돈벌이 수단’이나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값이 올라 돈을 버는 게 비상식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집값을 오르게 하는 지하철역, 학교, 공원 등의 편의 시설은 대부분 세금으로 만든다. 그 혜택으로 인해 이익을 얻었다면, 사회와 공익을 위해 분담해야 하는 것이 응당 옳은 관점이다. 그럼에도 현행처럼 해당 주택의 입지에 위치해있는 자연환경과 편의 시설 등을 사익을 추구하는 데에만 이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도 반드시 고민해봐야 한다.

 

작년 성탄절에 하늘로 올라간,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책은 수능의 언어영역 지문에도 자주 출제되어 학창 시절 필독서 중 하나였다. 책을 읽은 지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꼬마 열차를 타고 난쟁이 아버지가 귀가하던 장면이나 주인공 가족의 마지막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굴삭기가 집을 부수는 모습 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작품은 1970년 즈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현재 시점과 60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다. 재개발이 이뤄지지만, 돈이 없어 입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 그들의 입주권을 사들여 돈을 더 벌겠다는 사람들의 욕심, 약자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대책 없는 철거 등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오늘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무려 60년간이나 ‘집’에 대한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식의 생각이 계속되면 주택문제는 점점 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언제까지 이렇게 놔두어도 되는 걸까?

 

주택문제는 ‘생각’을 바꿔야 해결할 수 있다. ‘한 생각’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생각의 일대 전환, 그것이 진정한 혁신이며, 주택문제라고 하는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인구는 줄어드는데 도시는 더욱 비대해지고 집중화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쏠림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지금이라도 주택을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자. 주택을 ‘공공성이 있는 생물’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생각을 바꿨으면, 그 생각에 맞추어 바로 실행해야 한다. 임계점이 벗어난 언젠가,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위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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