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위한 空間(32)] 쓸모있는 노년을 위하여
- 소외와 단절이 아닌 ‘가치 있는 노년’에 대하여 -
3년 후인 2026년이 되면, 우리 한국은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다고 언론에서는 연일 관련 기사를 쏟아낸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찬 내용 일색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서 좋은 점이라고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찾을 수 없다.
물론 ‘고령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그만큼 노쇠(老衰)한 것이므로, 이에 따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여러 방면에서의 생산성도 저하될 것이라는 전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 사회에 있어서 노인(老人)과 고령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들만의 장점과 순기능적 요소는 과연 없을까? 언론 지면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령화의 폐해(弊害)와 노인인구 증가의 폐단(弊端)만을 부각할 정도로 노년층은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일까?
사람마다 살아온 모습과 경험들은 제각기 다르지만, 격정적 욕망에서 놓여난 노년, 그리고 경험의 깊이를 얻은 지혜로 충만한 노년이라면, 그에게서 사회는 분명 배울 점이 있을 터.
필자 역시 훗날 우리 사회와 젊은 세대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또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이것은 ‘쓸모있는 노인’이 되어 떳떳한 사회구성원으로 남겠다는 다짐이다.
어디 필자뿐이겠는가. ‘아름다운 죽음’을 겸허하게 고대하는 노년은 우리 모두 바라는 바다. 그런데 그러한 노년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년의 시기 이전, 즉 중장년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행동들이 있다. 그렇게 준비된 중년만이 가치 있는 노년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 키케로(기원전 106~43)가 있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共和政)이 몰락하고 황제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는 드라마틱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영원한 ‘공화주의자(Republicans)’로 살다 간 정치인이었다. 카이사르(시저)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에 황제가 되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음) 등 로마사에서 가장 빼어난 영웅들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에 빠져 있을 때, 키케로는 몰락해가는 로마 공화정을 붙들고 오로지 자유(自由)와 평등(平等), 이 두 가지의 가치를 동시에 이루려는 정치적 형이상학자였다.
사상가이자 웅변가로서, 또 빼어난 문필가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린 키케로의 눈에는 불행히도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체성(正體性)도, 시대 정신(精神)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로마의 세력권이 이탈리아반도에만 머물러 있던 단계에서만 제대로 기능하는, 위대하지만 이미 낡은 ‘공화정’이야말로 키케로의 유토피아(理想鄕)였는지도 모른다.
고전학자 앤서니 애버릿의 명저, ‘키케로’에서는 이 위대한 로마인의 최후를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제2차 삼두(參頭) 정치의 시작과 함께 추잡한 정략 살인이 결정됐고, 처벌자 명단에 오른 63세 노년의 키케로는 가마를 타고 도주한다. 그러나 포르미아에 있는 별장 근처 숲길에서 운명(運命)은 그를 버릴 터였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안토니우스의 부관, 헤렌니우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키케로는 하인에게 가마를 세우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마의 커튼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었다. 이윽고 헤렌니우스는 그의 머리를 칼로 내리쳤다.
그런 다음 헤렌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손을 몸에서 잘라냈다. 안토니우스는 헤렌니우스로부터 받은 키케로의 목과 손을 원로원 연단에 전시해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한참이나 늦은 부질 없는 짓이었다. 오늘날 안토니우스를 특별히 연구하고 기리는 이는 찾기 어렵지만, 키케로가 남긴 불멸의 저작(著作)들과 800여 통이 넘는 서간(書簡)은 오늘날까지 남아 당시 격동의 역사와 노회한 공화주의자의 빛나는 지혜를 웅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 인사이자, 당대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키케로는 인간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라고 말했다. 키케로의 또 하나의 위대한 저작, <노년에 관하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를 통해 노년에는 어떠한 사고(思考)를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 2,0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기원전 44년, 그러니까 키케로 자신이 처형되기 1년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노년에 관 하여>는 84세의 카토가 30대 젊은 정치가인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노년에 관하여>에서 카토는, 키케로의 대리자인 셈이다. 카토(Marcus Porcius Cato, 기원전 234~149)는 로마 최고의 역사서인 ‘기원론’을 남긴 당대 최고의 군인이자 정치가요, 문인이었다.
변호사로 성공한 정치가답게, 키케로는 자신의 대리자 카토의 입을 통해 노년에 대한 편견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반박하고, 늙는다는 것은 인생의 막바지에 받는 아름다운 선물임을 역설한다. 80쪽이 채 안 되는 작은 책자인 <노년에 관하여>에서 키케로가 주장한 내용은 시간을 초월해 지금의 우리에게도 더없이 참신하며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고전(古典)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그래서인지 키케로는 뱃사람들이 하는 일에 빗대어 노년의 가치(價値), 혹은 노년에 접어든 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 대목은 키케로가 노년(老年)에 관해 말하고 싶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키케로의 비유는 날카로우면서도 적절하다.
“노년에는 활동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는 셈이네. 그들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은 더러는 돛대에 오르고, 더러는 배 안의 통로를 돌아다니고, 또 더러는 용골에 괸 더러운 물을 퍼내는데 키잡이는 고물에 가만히 앉아 키를 잡고 있다고 해서 항해하는데 있어 키잡이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고,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과도 같네. 나이 든 선원들은 젊은 선원들이 하는 일은 할 수 없지만, 키잡이가 하는 일처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네. 큰일이란 체력이나 민첩성이나 신체의 기민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네. 그리고 이러한 자질들은 노년이 되면 대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난다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에서 노년뿐만 아니라 ‘젊음’에 관해서도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년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은 단지 노년의 가치뿐 아니라, 젊음의 가치를 새로이 인식하기 위해서도 소중하다는 점을 키케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자네들은 내가 칭송해 마지않는 노년(老年)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젊었을 적에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놓은 노년이라는 점을 명심해두게나. 진정한 귄위란 백발이나 주름살로 갑자기 앗아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권위란 명예롭게 보낸 지난 세월의 마지막 결실이기 때문이지.”
<노년에 관하여>는 ‘죽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키케로는 스토아(Stoa) 철학에 정통한 문인답게, 죽음을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래 보이는 키케로의 탄식은 실로 의연하다. 헤렌니우스에게 자신의 목을 내밀 때도 키케로의 영혼은 그렇게 의연했으리라!
“내가 삶을 떠날 때 집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임시로 체류할 곳이지, 거주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네. 따라서 이 혼잡하고 혼탁한 세상을 떠나 신과 같은 영혼들의 모임과 공동체로 출발하는 그날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인가!”
얼마 전 보았던 통계가 다시 떠오른다. 그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에 ‘장수 사회’에 접어들었다. 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2018년에 이미 15%가 되었고, 2026년이면 25%에 이를 것이라 한다.
사회는 이처럼 고령화되어가는데, ‘가치 있는 노년’을 맞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도리어 ‘노년’을 가까이해서는 안 될, 어떤 부정적 대상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로지 ‘안티에이징(Anti-Aging)’만을 외치며, 갖가지 성형술과 화장술을 동원해 외모만을 가꾸고자 하는 중년들의 발버둥이 안쓰럽다.
당(唐) 초기의 문인, 유희이(劉希夷, 652-680)는 ‘백발의 슬픈 늙은이를 대신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낙양의 처자들 고운 얼굴 아쉬워 / 길 가다 시드는 꽃 보며 긴긴 한숨 짓는데 / 올해 꽃 지면 고운 얼굴 변하느니 / 내년 다시 꽃 필 때 뉘라서 그대로일까?’
어린 처자들의 탄식이 앙큼하다. 낙양의 미소녀들조차 ‘가는 세월’에서 느끼는 무상감(無常感)은 중년의 그것 못지않았나 보다.
허나,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교수(1932-2013)는 생각이 다른 듯하다. 김 교수는 <노년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보면 위인들의 초상은 언제나 노안(老顔)의 모습을 그렸음에 주목했다.
“인간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더없이 거룩하고, 더없이 착실하게 여문 어른들의 용모가 여기 매우 덩그렇다. (...중략...)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들 위인의 용모를, 이들 대인의 풍모를 굳이 노년의 초상화에 담으려 했을까? (...중략...) 거기에 비로소 완벽과 성숙이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해가 바뀌어도 여전한 코비드19 바이러스와 함께 아등바등 살았던 2022년도 지나가고, 세월은 또 흘러 2023년의 봄이 되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간다는 말처럼, 올해도 나는 노년을 향해 가고 있다. 미혹함이 없어야 한다(不惑)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미혹하고, 거울을 볼 때면 두피 곳곳에서 제멋대로 솟아나 있는 하얀 머리카락이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기분이다. 게다가 중년의 중후함은커녕 그냥 좀 더 늙어버린, 주름살이 늘어난 얼굴만이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왠지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가는 그 얼굴이 보기 싫지 않다. 오히려 단전에 힘을 주고, 거울 속 얼굴을 다부지게 응시한다. 순간, 거울 뒤편에서 그 얼굴을 뚫고 나오는 손 하나가 보인다. 키케로의 손이었다.
<노년에 관하여>를 집필한 키케로의 주름졌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정신의 손! 그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노인 같은 데가 있는 젊은이를 좋아하듯이, 젊은이 같은 데가 있는 노인을 좋아한다네.” (Marcus Tullius Cicero)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