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돈 이야기(28)] 맹신과 소문을 이기는 투자법
- ‘휴리스틱’과 ‘확증 편향’의 오류에서 벗어나라 -
3월의 중턱에 이르니 지상에는 햇볕이 조금 더 오래 머무는 듯하다. 이렇게 날이 한결 따듯해지니 봄을 몰고 온다는 제비 생각이 난다. 우리의 뇌리에는 봄과 제비의 등식(等式)이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박혀 있다. 그러다가 집 앞마당에 날아든 한 마리 제비를 보고는, 겨울이 끝났다고 단정 짓고 얇은 옷을 입어 감기에 걸리는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는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는 늘 시간을 두고 변수를 두루 살피면서 신중해야 한다며,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일 우리는 이런 고민 속에 산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 내일 점심에는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짬뽕을 먹을 것인가? 친구와의 약속 장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갈까 아님, 버스를 타고 갈까?
어떤 경우든 사람의 인지능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100% 후회하지 않는 완벽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불확실하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능한 신속히 풀어내기 위해 ‘직관적 판단(intuitive judgement)’을 하게 된다. 이러한 추론 방식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한다. 휴리스틱은 ‘발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Hella) ‘Eurisko’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가 어렵다면 훗날 아르키메데스가 외친 ‘유레카’를 생각해보면 입에 붙는다)
이 휴리스틱은 좋게 말하면 ‘어림짐작, 어림셈’ 정도라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주먹구구식’ 판단을 뜻한다. 인간은 인지와 정보처리 능력에 한계가 있어 모든 정보를 탐색하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위주로 판단한다는 것이 휴리스틱의 핵심이다. 이 휴리스틱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 위주로 해석한다’는 일종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는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관에 맞추려 하면서 각종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휴리스틱의 오류’다. 이러한 휴리스틱은 선택에 이르는 과정을 단순하게 만들어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기 때문에 완전히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왜곡 등의 부작용도 많다.
예컨대, 특정 지역 출신 사람에 대해서 매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나, 맹목에 가까운 고정관념 등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만약 어떤 사람이 A 출신의 B라는 사람에 대해, ‘A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특정한 사고(思考)나 언행(言行) 등을 보인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졸지에 B는 그가 어떠한 언행을 하더라도 전형적인 A 지역의 사람으로 분류돼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돈이 걸린 주식 시장에서는 휴리스틱의 오류에 빠져 한숨의 나날을 보내는 개미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이다. 개미(일반 투자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종목이 어떤 뉴스를 가지고 있어서 얼마까지 간다더라’ 하는 일명 ‘카더라 통신’의 은밀하고 달콤한 정보를 듣게 되었을 때, 보통 그 기업의 주식을 매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그 이야기를 듣는 시점의 주식 가격이 매매의 기준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주식투자의 정석(定石)이라면, 매수하고 주가가 반대로 움직이면 어느 선에서 손절매하고 빠져나오는 게 원칙이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이 매수한 그 가격이 절대적 기준점이 되었기 때문에, 가격이 하락을 거듭해도 마냥 버티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처분 시점을 놓쳐버리고는 소위 ‘비자발적인 장기투자자’가 돼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향해 “지금은 워낙 시장이 안 좋아 하락했지만, 시장만 좋아지면 다시 그 가격에 도달할 거야”라며 희망 고문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6개월, 1년, 2년 지날수록 기준점이 되는 가격은 물론이고, 원금을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염없는 기다림에 지친 개미들은 결국, 매수한 가격의 10-20%에 가지고 있던 모든 주식을 매도한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주식은 안한다!”고 포효하고는 장렬히 시장을 떠난다. 개미들이 알토란 같은 재산을 날리는 과정은 대개 이런 식이다.
최근 필자도 지인 둘이 주식투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한 친구 왈, 삼성전자하고 네이버, 엔씨소프트 이렇게 한국을 대표한다는 우량기업을 좋다고 추천받아 꽤 많이 샀는데, 이게 정말이지 대단히 속을 썩이고 있단다. 그러면서 “반에 반토막이 된 지금이라도 이걸 정리해?” 하고 다른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말에 자칭 주식 도사는 세상에 초연한 듯한 산신령 같은 목소리로 “그냥 그대로 둬.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2030년까지 묻어 둬. 시간이 흐르면 나중에 다 오르게 되어있어. 아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필자는 속으로 ‘저 주식들 없길 잘했네’라고 내뱉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다. 2030년이면 대략 7년 뒤이니, 그때 가서 95,000원에 매수한 삼성전자 주식이 본전을 훌쩍 넘어, 13만 원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120만 원에 달했던 엔씨소프트 주식이 지금은 40만 원이 되어있지만, ‘언젠가는’ 친구의 바람대로 고점을 회복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가의 향방을 예측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니, 더 이상의 말은 뱀의 발 일터.
한편, 이슈나 업종별로 여러 종목을 하나로 묶는 ‘테마주(株)’역시 휴리스틱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선거철만 되면 나도는 유력 정치인의 이름을 딴 ‘OOO 관련주’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테마주는 증시의 호, 불황과 관계없이 기승을 부리는데, 종목의 실적이나 사업성을 따지지 않고 같은 테마로 분류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가가 급등한다.
물론 그중에는 테마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있지만, 엉뚱한 주식도 많아 피해를 보는 투자자가 생긴다. 지난 2000년, IT버블기(닷컴버블)에는 웬만한 IT기업들의 주식은 품귀현상을 빚으며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나중에 옥석이 가려지면서 등락이 엇갈리긴 했지만, 대다수가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부실기업으로 밝혀지면서 주가는 대폭락했다.
요즈음에도 기술적 분석을 맹신하는 투자자가 많다. 기술적 분석이란 앞으로 주가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위해 주가와 거래량의 과거 흐름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적 분석은 대개 과거 자료를 수단으로 정리한 후 이로부터 주가가 움직이는 패턴을 추정한다. 이런 데이터는 대부분 차트(chart)로 표현되기 때문에 ‘차트 분석’이라고도 한다. 차트에 나타난 패턴은 일종의 방향지시등으로서 지지선과 저항선, W형, M형, 삼각형, 사각형, 엘리엇 파동 등 여러 형태로 주가 변동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차트가 주가의 과거 움직임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것이 미래의 주가 움직임까지 알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래의 주식 동향은 수많은 변수에 따라 결정됨에도 단순히 차트의 추세선을 보고 미래의 주가 향방을 예측하는 것은 전형적인 ‘휴리스틱의 오류’다. 그래서일까? 증권사 센터장을 지낸 인물들이 언론에 나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차트 위주로 주식 매매를 유도하는 영업직원들의 성과가 제일 낮았다고 한다.
사이드미러만 보면서 운전하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듯, 카더라 통신, 테마주, 기술적 분석 등 휴리스틱의 오류들로 점철된 주식투자는 실패하게 돼어 있다. 그렇다면 휴리스틱 투자의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기업이 가진 ‘내재가치’를 분석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의 향후 수익을 전망한다고 해서 투자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 주가는 실적에 비례하기도 또 비례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타이밍(시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도 올바른 투자의 태도는 아니다.
결국 우리 투자자들이 언제든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하는 자세는 ‘인내’다.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면 끈기 있게 기다리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하필 일찍 날라 온 제비 한 마리를 보고는 봄이 온 줄 알고 외투를 치우는 우(愚)를 범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