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돈 이야기(27)] ‘돈의 철학’, 돈을 위한 변명
-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초상 -
필자가 <뉴스본>에 연재하고 있는 코너의 제목은 ‘돌고 도는 돈 이야기’다. 오늘은 코너의 제목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지구를 돌고 있는 ‘돈’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돈’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또 돈은 어떻게 시작되고, 누구에 의해 탄생 된 걸까? 우선, 돈이라는 말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이 세상을 돌고 도니까 돈다(turn)’에서 비롯했을 거라는 민간 어원설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필자 역시 경제 및 재테크 칼럼 코너의 제목을 지어달라는 편집장의 요청에 단번에 ‘돌고 도는 돈’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 인류 역사를 기록한 문헌상에 돈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난 건 15세기경이라지만, 실제로 교환 가치가 있는 화폐적 기능을 지닌 주화(鑄貨)가 나타난 건 기원전 7세기 말이다. 그뿐 아니라 은이나 금 같은 귀금속을 돈으로 이용한 관습은 놀랍게도 기원전 24세기의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돈이 우리 인류와 함께해왔고, 인류와 돈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경우 1097년(숙종 2년), 고려의 승려 의천(義天)이 엽전을 만들어 사용하자고 왕에게 건의한 <화폐론>을 쓰면서 화폐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책에서 의천은 엽전의 생김새를 두고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뜨고 모난 것은 땅을 본떴다고 하고, 또 만물을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이치를 구현함을 뜻한다. 이런 생김새를 한 돈은 어디든지 흘러 다니고 상하 백성에게 두루 퍼져 날마다 써도 무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의천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 우리나라 최초의 엽전인 ‘해동통보(海東通寶)’가 만들어졌다.
고려조 무인(武人)의 난(亂) 직후인 12세기 말, 임춘(林椿)이 지은 가전체 소설인 <공방전(孔方傳)>에서 ‘공’은 둥글다, ‘방’은 모나다는 뜻이다. 임춘은 엽전 형태의 돈을 그렇게 일컬으면서, 마치 사람인 것처럼 의인화해 전(傳)을 짓고, 그 내력 및 행적을 흥미롭게 서술했지만, 실은 ‘공방’이란 겉으로는 둥그나 속이 모난 사람이라고 해서 돈의 폐해를 논하는 글이기도 하다. 똑같은 엽전인데도 이처럼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그린 부분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돈을 바라보는 인간의 양극적 관점에는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돈의 가치 체계는 절대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범주를 보기 좋게 허물고 ‘머니즘(money+ism)’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돈에 대한 인간의 무(無) 반성적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고, 돈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부풀리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카를 멩거(Carl Menger)는 “화폐는 물물 교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 된 발명품이다”라고 했지만, 오늘날 돈의 기능은 그렇게 소박한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21세기에 돈은 그 자체가 언어이고 행위이고, 사유가 되어 그것 자체로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인간이 돈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돈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돈을 물질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돈이 ‘들어온다’, 혹은 돈이 ‘나간다’라고 표현하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대한다. 돈은 그저 물적(物的) 재화로서 돌고 도는 성질이 있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고매(高禖)한 존재가 되어 우리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속박하는 것일까.
돈을 바라보는 대립적인 두 가지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돈을 예찬하는 입장에서는 돈이 삶을 풍요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재화(財貨)라고 생각하지만,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악화(惡貨)라는 입장이다. 돈을 잘 써서 천국으로 갔다거나 살아 있는 동안 호의호식하고 무사태평했다는 식의 해피엔딩 얘기는 별로 없다.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얘기이니 만들어낼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돈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어보자.
고려 공민왕 때 어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다. 둘은 우애를 과시하며 형 하나 아우 하나, 금덩이를 나눠 가졌다. 그런데 기분 좋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물에 던져버렸다. 놀란 형이 다급하게 이유를 묻자, 아우가 대답하기를 “금을 나누어 가지니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금이 상서롭지 못한 것인 줄 알고 얼른 물에 던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형도 그 말이 맞다며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지금 같으면 둘 다 정신병원으로 보내질 만한 행동이라며, 뭇사람들의 호된 질타를 받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이 금덩이를 버린 강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금덩이를 찾기 위해 머리통이 깨져라 자맥질을 해댈 것이다.
사실 필자는 돈에 대해 약간의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다. 어찌 보면 그간 읽어온 수많은 책들로부터 ‘돈은 인간을 망치고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세뇌를 당한 탓일 수도. 여기에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위 ‘글쟁이’가 된 사람들, 예술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와 같은 편견이나 고정 관념을 일부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 중에는 유난히 가난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돈이 없고 가난하면 청렴해지거나 고고(孤高)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역으로 돈이 없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가난은 돈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현재 자신의 처지를 돈과 결부시켜 말하는 사람이 많다. 모든 게 돈 때문에 어긋나고, 일그러지고, 망가졌다고 강변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성실성은 차치하고 오직 돈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푸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는 얄팍한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돈은 언제나 ‘동일한’ 본질, ‘동일한’ 기능, ‘동일한’ 조건으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돈의 속성’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오염시키고, 결국 유혹과 타락을 조장하는 악마의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 돈의 진면목(眞面目)을 철저히 왜곡한 것이다.
<돈의 철학>을 집필한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돈은 ‘세상의 상징이자 거울’이라고 강조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투사되는 인간의 욕망을 문제 삼은 것이다. 돈을 향한 맹목적 자기 투사(投射)는 자아의 망실(亡失)을 불러온다. 돈은 거울처럼 모든 욕망을 되비추지만, 자신의 본질을 망실하지는 않는다. 돈은 오직 ‘돌고 돌며’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흘러갈 뿐이다. 돈을 향한 자기 투사의 결과, 남는 건 오로지 돈으로부터 격리당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존재론적 바탕이 된다. ‘노동’을 하고, 그에 반대 급부적인 ‘월급’을 받아 ‘의식주’를 해결하는 시스템으로 이뤄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초상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방도가 없다. 문제는 ‘돈과 나’의 관계성이다. 돈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필수 불가결한 인간 삶의 요소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컨트롤’ 여부다.
중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한다. 하루는 문방구에서 지갑을 구경한 적이 있다. 번쩍이는 브라운 컬러의 가죽 지갑이었는데, 그것을 펼치자 안쪽에는 금박으로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Money, you control it or it controls you!” 그때는 의미도 모른 채 대구(對句)를 형성한 그 문장이 좋아 자연스럽게 기억했는데, 오늘에 와서야 ‘컨트롤’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돈을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컨트롤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돈의 순수성 앞에 허물어진다. 허물어질 뿐 아니라 돈의 고유성을 오염시키고, 그것에 온갖 그릇된 욕망과 망상을 투사해 아비지옥, 아비규환의 풍경을 연출해낸다. 돈이 나쁜 게 아니라 제어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이 그릇된 것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를 나타낼 때 진리(眞理)는 입을 다문다’는 제정(帝政) 러시아의 속담이 있다. 물론 진리는 돈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돈을 진리와 결부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가감 없이 돈을 돈으로만 봐야 한다. 그래야 돈은 부적절한 상징에서 해방되고, 돈 자체의 순수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돈의 이미지 회복과 순수성 회복은 오랫동안 돈의 초상을 왜곡해온 우리가 풀어야 할 21세기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