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를 위한 空間(28)] 한국 정치에서 상식의 회복은 가능할까?
- 상식이 무너진 사회 -
미국 독립 혁명의 가장 유력한 동인(動因) 중 하나는 1776년에 쓰여진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의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저서다. 토머스 페인은 이 작은 책자(팜플렛)에 ‘상식’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 “나는 간단한 사실과 명백한 논거, 상식 이상의 것은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분쟁은 영국이 아메리카의 성장세와 민중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상업제국의 위상을 단단히 하기 위해 아메리카를 본국의 강력한 통제를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페인은 1773년 영국의 차(茶) 조례에 반항하여 보스턴 항에 정박한 배에 실려있는 차 상자를 바다에 버리는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3세의 통치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팜플렛을 제작하게 된다.
페인은 이 팜플렛에서 정부의 기원과 그 목적을 밝혀 영국 정부의 방식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을 밝히고, 아메리카 민중은 당연히 반항할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아메리카는 충분히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1776년 당시의 미국인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이처럼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타당한 ‘상식(常識)’에 입각한 주장은 신대륙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리고 그 열망은 독립에의 의지를 품게 했고, 결국 영국으로부터의 독립(獨立)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만큼 ‘상식’에 기반한 주의(主義) 및 주장(主張)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그 반석 위에서 정부 조직의 운영 원칙이나 원리 등 국가적 대계(大計)를 세울 수 있는 강력한 모티브가 된다.
그러나 2023년의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러한 ‘상식’이 통용되지 않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상식(common sense)’이란 지극히 자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깊은 이해나 고찰을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상식에 맞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자, 공통으로 준수되어야 할 규칙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식에 벗어나면 지탄을 받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너무도 흔해서, 이제 도대체 ‘진짜 상식’이 무엇인지도 헷갈리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바로 우리 ‘정치 이야기’다.
서기 2023년, 오늘의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개인적’ 범죄혐의를 받고있는 제1야당의 대표는 다수당의 힘을 빌려 자신에 대한 사법적 조치에 대해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도 당당히 대항하고 있다. 또 1심에서 범죄가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전(前) 정부의 모 장관은 여전히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도 자신의 떳떳함을 표출한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후원금을 오랜 기간 횡령하고 유용한 혐의로 기소된 야당의 윤모 의원은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벌금형이 선고되자, 지지자들과 파티라도 벌일 요량으로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이 뉴스를 장식했다. 게다가 언제나 중립에 서 있어야 하는 대통령실은 여당의 당 대표 선거에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 목표하던 바를 이루었다. 이 모두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들이다. ‘상식 파괴’라는 퇴행적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오늘의 우리 정치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탄식하고 있다.
이처럼 스스럼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의 상식파괴’ 뒤에는 진영마다 극렬 지지층이 존재하고 있다. 한쪽은 ‘개딸’이라 불리는, 듣기에도 민망한 정체불명의 이름을 가진 야당 대표의 홍위병들이, 한쪽은 ‘윤빠’라고 불리는 맹목적인 여권 지지층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상식을 벗어나도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는 것을 활용하여 ‘비상식의 상식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 정치의 최종 목표는 ‘권력의 획득’인데, 이는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일부에 불과한 극렬 지지자들만으로는 결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극렬 지지층과는 달리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다수의 시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정규분포 곡선(normal distribution curve)을 떠올려 보자. 정규분포 곡선은 좌우 양쪽은 낮고, 중간 부분이 볼록하게 올라가 있는 종(bell)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 듯 자연(nature)과 사회현상에서 비롯된 수많은 결과들은 그 값이 평균에 집중되어 있고,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즉 양극단(兩極端)으로 갈수록 도수가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한 방향으로 치우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중립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국민들이 다수다.
양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맹렬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지만, 중립적 위치의 국민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의 의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른바 잠재 집단(potential group)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판단은 선거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상대적으로 다수인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삼척동자도 아는 선거 승리의 ‘상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양극단에 속한 집단의 지지만을 의식한 비상식적 행위들이 지속되고 있다. 제1야당은 오로지 당 대표를 지지하는 특정 세력을 향한 메시지 관리에만 주력하고, 여당은 대표선출 권한을 당원에만 한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소수 지지자들은 환호할지 모르나, 중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양당 모두 말 없는 다수의 중간집단의 지지 획득은 포기한 듯, 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지지하지 않지만, 누구도 지지할 수 있는 ‘중간적 잠재 집단’의 지지를 획득하는 정파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2030 유권자들을 포함한 이 스윙 보터(swing voter)들은 어느 정파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누구를 지지하는지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지역이나 이념적 지향에 얽매이지 않고, 정치 상황과 이슈 또는 정책에 따라 자유롭게 표를 던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무엇보다 ‘상식’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린다.
한국 정치는 이제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개인의 범죄행위는 개인적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 ‘상식’이고, 적어도 집권 여당의 대표를 뽑는 선거라면 국민들에게 국가 정책의 운영 비전을 제시하며 경쟁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보면, 우리 국민들은 선거마다 현명한 결정으로 정치 세력들의 오판에 경종을 울린 경우가 많았다. 오만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는 정파들에게는 철퇴를 가하는 투표 결과를 보여주었다.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의 파티’는 모두 내년 총선을 의식한 결과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떻게든 자기 당의 공천권만 쥐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자고(自古)로 국민들은 생각보다 훨씬 현명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이길 수는 없다. 지금처럼 비상식적인 행위를 되풀이하면 국민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짜 ‘상식’이며, 국민의 준엄한 목소리를 외면하는 정치 집단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 시민이 진짜 ‘상식적’인 사람일 것이다.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