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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으로

강건욱 칼럼니스트 입력 : 2022.11.14 수정 : 2022.12.1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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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를 위한 空間 (2)]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으로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현명한 ‘리더’일 것이다.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명석하면서도 따듯한 가슴을 지닌 리더’의 출현에 목말라 한다. 로마 역사에서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며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끈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를 오현제(五賢帝)라 칭한다. 그중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인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스토아(Stoa) 철학의 대가이기도 하여 철인(哲人)황제라 불리며, 불후의 고전인 명상록(瞑想錄)을 남겼다.

‘명상록’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을 가졌던 마르쿠스가 스스로의 단상(斷想)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고전은 삶에 지친 영혼을 향해서는 스스로 일어서도록 격려하고, 세상과 타인을 향한 미움으로 가득한 영혼에게는 거울을 선물해 인생을 밝고 아름답게 꾸려가는 비결을 알려준다. 깊어 가는 가을, <뉴스본> 독자들이 명상록을 통해 따듯한 위로를 받길 바라본다.

서양 철학의 기둥을 세웠다는 평을 받으며 ‘이상적인 정치가는 철학자다’라고 말한 플라톤이 아주 흡족할 만한 황제가 로마 제국에 있었으니, 그 이름하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다.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준비된 군주였는데, 독특하게도 어릴 때부터 철학자 복장을 하고, 안락한 침대보다는 맨 바닥에서 잤다고 한다. 유달리 검소하고 배움을 좋아했던 마르쿠스는 일찍이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는데, 스토아 철학은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 양식을 인간에게 제시 하는 것으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서양 철학사의 주요한 줄기 중 하나였다.

마르쿠스는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할아버지와 인척이었던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입양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일찍부터 철이 든 마르쿠스를 총애해 훗날의 황제로 키우게 된다. 서기 13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161년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마저 서거하자 마르쿠스는 마흔의 나이에 황제에 오른다. 다소 늦은 즉위였지만, 마르쿠스는 이미 황제로서뿐 아니라 탁월한 철학자로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르쿠스가 즉위하자마자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 마르쿠스는 재위 중 상당 기간을 전선에서 보낸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더욱 성숙해진 그의 철학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처절한 전장에서 얻어낸 실존적 교훈이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가고, 최고 통치자인 자신은 이리저리 전장을 떠돌았지만 마르쿠스는 철학을 통해 자신을 구원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정신적 권력이자 도구였고, 외부에서 밀려드는 시련으로부터 스스로를 철통같이 지켜내는 사색의 성채(城砦)와도 같았다. 마르쿠스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철학적 사색이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한 예지와 통찰이 담긴 짧지만 깊은 글을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했다. ‘명상록’은 바로 이것을 모은 일종의 메모집이다. 명상록이라는 이름은 후대인들이 붙였는데, 헬라어 원제목은 ‘타 에이스 헤 아우톤(ta eis heauton)’이며, 이는 ‘나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이 메모를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하기 위해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책의 제목을 두고 명상록보다는 ‘자경록(自警錄)’이라 해야 원 뜻에 더 가깝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일견 타당하다. 위기에 처한 로마 제국 황제에게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을 테니까. 여기서 플라톤의 예지는 빛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고,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로마인들은 다름 아닌 짙은 사유의 옷을 입은 철학자로서의 황제를 최고 통치자로 원했다.

명상록을 읽는 독자들은 평온한 영혼이 단정하게 깃든 듯, 잔잔하고 고요한 음성으로 사색에 잠기게 하는 이 책이 실제로는 창과 칼이 난무하고 선혈이 낭자했던 극렬한 전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것이다. 마르쿠스는 전장의 임시 막사에서 토막잠을 자면서도 자신의 하루를 진지하게 점검하고, 황제 또는 지휘관으로서가 아니라 우주의 원리와 인간 이성의 힘을 따르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심연(深淵)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물론 마르쿠스는 철학적으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겨룰 수 없다. 문필가로서도 뛰어난 솜씨가 있었지만, 로마 최대의 문장가라 불린 키케로에 비견될 수는 없었다. 마르쿠스는 제국을 지켜야 하는 황제였다. 온종일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적인 업적 하나 없고, 유려한 문장의 규범을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나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일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칠흑 같은 삶의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살이의 힘듦 속에서 영혼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날, 플라톤의 철학이나 키케로의 화려한 문장이 아닌 마르쿠스의 ‘명상록’을 마음의 등불로 삼고 늘 머리맡에 두고 있다. 그렇게 오늘의 우리들은 고독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준엄하게 새겨둔 아름다운 경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황제라는 직위나 정복자로서의 자질 또는 그로 인해 듣게 될 명성에 연연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존중했다. 노예 신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황제 마르쿠스, 그에게 최고 통치자라는 명성은 평온한 영혼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보통 명성에 집착하고 염려하는 자들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모두 곧 죽음에 이를 것이고, 그다음 세대도 죽을 것이며,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에 대한 기억도 이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에 마르쿠스는 말한다. “만일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불멸이고, 따라서 너에 대한 기억이 불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체 이미 세상을 떠난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칭찬이 죽은 자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차치하고, 산 사람에게도 부차적인 이익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너는 후세 인 들의 평판에 매달림으로써 지금 자연이 너에게 준 선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행복과 선(善), 욕망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학문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제국의 변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면서도 철학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 사색을 거듭했으며, 자신의 태만을 무시하지도, 또 즐기지도 않았다. 진정 자신을 이겨낸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어렵고 위대한 일일 것이다. 명상록의 뒷부분에는 마치 수도자의 득도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엄한 메모가 하나 있다. 이것은 스스로를 이겨낸 자의 사자후(獅子吼)다.

 

 “오늘 나는 모든 방해에서 벗어났다. 아니, 모든 방해를 내던져버렸다. 왜냐하면 방해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 내 판단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1월이다. 겨울을 부르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맞은 나목들은 거리거리에서 저 홀로 외롭다. 나목들을 지나쳐 걷는 우리들의 발걸음만 분주하다. 그러나 정말 외롭고 분주한 것은 마르쿠스의 말처럼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고 죽는 것이, 그리고 피고 지는 것이 수레바퀴처럼 처음과 끝이 없거늘, 죽고 지는 것이 나고 피는 것과 다름이 있을 리 없다. 저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나목은 이미 단단한 싹을 준비하고 있을 터인데, 외롭고 분주한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앙상한 마음 아니겠는가?

서점에서 명상록의 부제를 보니 마르쿠스를 ‘위대한 멘토’라 칭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위한 출판사의 모습에 뭔 수선인가 싶다가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만한 멘토도 없지 하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2,000년이 지나도 위대한 멘토로 남은 마르쿠스처럼 우리도 자신과의 진검 승부를 위해 전가(傳家)의 보검(寶劍)을 꺼내자. 그리고 전장의 폭풍 전야 속에서 막사에 홀로 앉아 ‘명상록’을 읽으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자. 그리고 외쳐 보자. “오늘 나는 모든 방해에서 벗어났다”고.

글 강건욱 / 문예지 기자 및 인문학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예술과 문학, 대중문화에 관한 칼럼과 평론을 쓰고, 저명인사를 인터뷰했다. 현재는 문화평론가 및 프리랜서 인문학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며,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강연 및 콘텐츠를 기획, 모더레이팅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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